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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시작하는 연애

문자 하나 보내는 데 한 시간이 걸리는 연애

결혼 생활 십여 년 동안 쓴 문자는 장보기 목록과 아이 하원 시간뿐이었습니다. 녹슨 연애 감각이 어떤 순서로 돌아오는지 따라가 봅니다.

문자 하나 보내는 데 한 시간이 걸리는 연애AI 모델 사진

밤 열 시 반, 대화창에 문장 하나를 써 놓고 벌써 사십 분째입니다. "오늘 하루 잘 보내셨어요?" 너무 딱딱한가 싶어 지웁니다. "오늘 어떠셨어요" 뒤에 웃음 표시를 붙였다가, 몇 개를 붙여야 가벼워 보이는지 몰라 또 지웁니다. 회사에서는 보고서를 한 시간에 두 장씩 쓰는 사람이 문장 한 줄 앞에서 이러고 있습니다. 열한 시 반이 넘어서야 보내기를 누르고, 휴대폰을 엎어 놓습니다.

십 년 넘게 결혼 생활을 하고 나온 사람에게 연애는 자전거보다 외국어에 가깝습니다. 몸이 기억해 줄 거라 믿었는데, 막상 해 보면 단어부터 생각나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쓴 문자는 장보기 목록이었다

휴대폰 속 지난 대화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이유가 보입니다. 전 배우자와 주고받은 문자는 대부분 용건이었습니다. 우유 사 와, 애 학원 끝났어, 몇 시에 와. 다정한 말이 오가던 시절도 있었겠지만 까마득한 옛일이고, 그동안 손가락은 짧고 정확한 문장만 연습했습니다.

그래서 새로 만난 사람에게 보내는 문자가 업무 연락처럼 나옵니다. 질문은 분명하고 마침표는 정확한데 온기가 없습니다. 상대가 차갑다고 느낄까 봐 이번에는 반대로 길게 씁니다. 하루 일과를 문단 세 개로 보내 놓고 나서야 너무 많이 썼다는 걸 압니다. 감이 없다는 건 이렇게 양쪽 끝을 오가는 일입니다.

십 년 사이 바뀐 것은 생각보다 적다

세상이 많이 바뀌어서 따라가지 못할 거라는 걱정도 듭니다. 바뀐 것은 있습니다. 읽고도 한참 답하지 않는 일이 흔해졌고, 대화가 메신저 안에서 꽤 오래 이어집니다. 처음 만나기 전에 통화를 한 번쯤 하는 것도 자연스러워졌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반가워하는 것은 그대로입니다. 자기가 지나가듯 한 말을 상대가 기억해 주는 것, 하루 중 한 번 나를 떠올렸다는 표시, 무리하지 않는 꾸준함. 스무 살 때 설레던 이유와 마흔다섯에 설레는 이유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말투는 금방 배우고, 마음이 움직이는 원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좋다는 말을 어디에 두는지 잊어버렸다

결혼 생활에서 호감은 대개 행동으로 오갔습니다. 아침밥을 차리고, 차에 기름을 넣어 두고, 아픈 날 약을 사 왔습니다. 말로 좋다고 할 일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다시 연애를 시작하면 마음은 있는데 그걸 문장으로 꺼낼 자리가 비어 있습니다.

처음부터 크게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감정을 고백하는 문장 대신 있었던 일을 하나 짚는 문장이 편합니다. "아까 말씀하신 그 책, 저도 찾아봤어요." "오늘 얘기하면서 시간 가는 줄 몰랐어요." 이 정도면 상대는 충분히 알아듣습니다. 좋아한다는 말은 이런 문장이 몇 번 오간 뒤에야 자연스럽게 나옵니다.

데이트 신청이 회의 일정 잡듯 나올 때

오랜만에 연애하는 사람의 데이트 신청에는 닮은 데가 있습니다. "편하신 요일과 시간 알려 주시면 맞추겠습니다." 예의는 바른데 설렘이 없습니다. 결정을 상대에게 통째로 넘기는 말이라 받는 쪽도 답하기가 의외로 어렵습니다.

제안은 구체적일수록 가볍게 들립니다. "토요일 점심에 지난번 말한 칼국숫집 같이 가 볼래요? 안 되면 다른 날 잡아도 돼요." 장소와 때를 내가 먼저 꺼내고, 빠져나갈 문도 하나 열어 둡니다. 거절당해도 덜 민망하고, 받는 사람은 고르기만 하면 됩니다.

칭찬을 받는 법도 잊어버렸다

녹슨 건 보내는 쪽만이 아닙니다. 받는 쪽도 서툴러집니다. "오늘 옷이 참 잘 어울려요"라는 문자에 "아니에요, 다 늙어서요"라고 답해 놓고 바로 후회합니다. 오래 칭찬 없이 살다 보면 좋은 말이 오면 일단 밀어내는 버릇이 생깁니다.

밀어내는 답은 겸손해 보여도 상대에게는 작은 거절로 닿습니다. 다음에는 그냥 받아 봅니다. "고마워요. 덕분에 하루 종일 기분 좋겠네요." 칭찬을 기분 좋게 받는 사람에게 상대는 한 번 더 좋은 말을 건네고 싶어집니다. 마음이 오가는 길은 그렇게 조금씩 넓어집니다.

화면 건너편도 녹슬어 있다

잊기 쉬운 것이 하나 있습니다. 화면 건너편의 사람도 비슷한 시간을 지나왔다는 점입니다. 그 사람 역시 문장 하나를 몇 번씩 고쳐 쓰고, 내 답장이 짧으면 자기가 뭘 잘못했나 되짚고 있을지 모릅니다.

이걸 알면 서툰 쪽을 드러내도 됩니다. "제가 이런 연락이 너무 오랜만이라 말투가 딱딱해도 이해해 주세요." 이 한 줄을 보낸 뒤로 대화가 오히려 풀렸다는 사람이 많습니다. 서로 녹슬었다는 걸 인정하고 나면 실수가 웃을 거리로 바뀝니다.

감은 문장, 박자, 장난기 순으로 돌아온다

감각이 돌아오는 데에는 대략의 순서가 있습니다. 먼저 문장이 돌아옵니다. 몇 주쯤 대화를 이어 가면 쓰고 지우는 시간이 눈에 띄게 줄어듭니다. 다음은 박자입니다. 언제 답하고 언제 쉬어야 할지, 언제 만나자고 해야 할지가 머리가 아니라 느낌으로 잡힙니다.

장난기는 가장 늦게 옵니다. 상대의 말을 살짝 농담으로 받아치고, 그걸 상대가 웃으며 받는 순간이 오면 꽤 많이 돌아온 겁니다. 이 순서를 건너뛰려고 처음부터 재치 있는 사람인 척하면 오히려 어색해집니다. 딱딱한 문장으로 시작해도 괜찮습니다.

여러 사람과의 대화가 연습장이 되지 않게

감을 빨리 찾고 싶어서 동시에 여러 사람과 대화를 늘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연습량은 늘지만 한 사람 한 사람에게는 무성의해지기 쉽습니다. 녹슨 감각은 횟수보다 한 사람과의 대화를 길게 이어 갈 때 더 빨리 돌아옵니다. 상대의 답을 읽고 그 답에 맞춰 다음 말을 고르는 일을 되풀이해야 하니까요.

보내기 전에 망설여진다면 기준은 하나면 됩니다. 소리 내어 읽었을 때 내 말투처럼 들리는가. 평소에 쓰지 않는 표현이라면 지웁니다. 상대가 만나고 싶은 건 잘 다듬은 문장이 아니라 그 문장을 쓴 사람입니다.

오늘 밤에도 문장 하나를 붙들고 있다면 세 줄을 넘기지 말고, 십 분 안에 보내고, 휴대폰은 내려놓습니다. 한 시간 고친 문장과 십 분 만에 보낸 문장의 차이를 상대는 거의 알아채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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