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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 후 회복·자존감

결혼반지는 아직 서랍 안에 있다

버리지도 끼지도 못한 반지, 펼치지도 버리지도 못하는 웨딩 앨범. 결혼의 물건을 보내거나 남기는 몇 갈래 길과 그 앞에서 머뭇거리는 마음을 살펴봅니다.

결혼반지는 아직 서랍 안에 있다AI 모델 사진

겨울옷을 꺼내려고 서랍장 맨 아래 칸을 열었다가 작은 벨벳 상자에 손이 닿습니다. 열어 보지 않아도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압니다. 이사할 때 버리지도 못하고 챙겨 온 상자입니다. 그 옆에는 모서리가 닳은 웨딩 앨범이 누워 있습니다. 서랍을 도로 닫습니다. 오늘도 정하지 못했습니다.

결혼의 물건은 이상한 자리에 있습니다. 쓸 일은 없는데 버리자니 손이 떨리고, 두자니 볼 때마다 마음이 내려앉습니다. 정답은 없지만 물건마다 고를 수 있는 길은 생각보다 여럿입니다.

반지를 빼던 날보다 어려운 것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는 건 한순간입니다. 어려운 건 그다음, 뺀 반지를 어디에 둘지입니다. 많은 사람이 일단 상자에 넣어 두고 몇 해를 보냅니다. 그것도 하나의 선택입니다. 마음이 정해지지 않았을 때 정하지 않는 것은 미루는 게 아니라 기다리는 쪽에 가깝습니다.

다만 기다리는 동안 그 상자는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있어야 합니다. 화장대 위나 매일 여는 서랍이라면 날마다 같은 결정을 미루는 셈이라 지칩니다. 신발장 위 수납함처럼 일부러 찾아야 보이는 곳으로 옮기면 반지는 짐이 아니라 보관품이 됩니다.

금은방 유리 진열장 앞에서

팔기로 했다면 몇 가지를 알고 가야 덜 서운합니다. 금반지는 대개 금의 무게로 값을 매기기 때문에 살 때 치른 디자인값이나 공임은 거의 돌아오지 않습니다.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는 보증서가 있어도 산 값보다 한참 낮게 쳐 주는 일이 흔합니다. 숫자를 보고 허탈해지는 날이니 기대를 낮추고 두세 곳에서 값을 물어봅니다.

판 돈을 어디에 쓸지 미리 정해 두는 사람도 있습니다. 생활비에 섞으면 흔적 없이 사라지지만, 아이 학원비 한 달이나 혼자 떠나는 여행 경비처럼 이름을 붙여 쓰면 그 반지가 마지막으로 한 일이 분명해집니다.

녹여서 다른 모양으로

팔기도 버리기도 싫다면 다시 만드는 방법이 있습니다. 반지를 녹여 펜던트나 작은 귀걸이로 바꿔 주는 공방과 금은방이 있습니다. 금은 그대로인데 뜻이 달라집니다. 누군가의 아내나 남편이었다는 표시가 아니라, 그 시간을 지나온 내가 하는 물건이 됩니다.

반지 안쪽에 새긴 날짜와 이니셜은 녹이면 사라집니다. 그게 아쉬울지 시원할지 한 번 생각해 보고 맡깁니다. 맡기기 전에 반지 사진을 한 장 찍어 두는 사람도 있습니다. 물건은 보내도 그 모양을 기억할 길은 남겨 두는 셈입니다.

무겁고 큰 웨딩 앨범

스튜디오에서 만든 앨범은 크고 무거워서 버리기도 애매합니다. 종이 쓰레기로 내놓자니 누가 펼쳐 볼까 신경이 쓰입니다. 정리하기로 했다면 몇 장만 따로 빼 두고 나머지는 잘게 찢어서 내놓는 편이 마음 편합니다.

없애기 전에 골라 둘 사진이 있습니다. 내 부모님이 환하게 웃는 사진, 지금은 돌아가신 할머니가 한복을 입고 앉아 계신 사진, 친구들과 찍은 단체 사진. 결혼식 사진 안에는 두 사람만 있는 게 아닙니다. 그 사람을 빼고도 남길 수 있는 장면은 남겨 둡니다.

아이 몫으로 남겨 둘 한 권

아이가 있다면 다르게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아이에게 그 결혼은 지워도 되는 과거가 아니라 자기가 태어난 출발점입니다. 스무 살 무렵이 되면 부모가 한때 서로 좋아했다는 흔적을 찾는 아이가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앨범은 정리하더라도 사진 열 장 정도는 봉투에 넣어 아이 몫으로 둡니다. 겉에 "네가 크면 줄게"라고 적어 두면 내가 실수로 버릴 일도 없습니다. 반지를 같은 방식으로 아이에게 넘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언제 줄지는 아이가 물어 올 때 정해도 늦지 않습니다.

거실 벽의 가족사진

아이가 있는 집에는 반지보다 큰 숙제가 벽에 걸려 있습니다. 돌잔치 무렵 사진관에서 찍은 가족사진 액자입니다. 떼어 내자니 벽지에 네모난 자국이 남고, 아이가 그 빈자리를 쳐다볼까 마음이 쓰입니다.

아이에게 먼저 물어보는 편이 낫습니다. "이 사진, 네 방에 걸어 줄까? 아니면 상자에 넣어 둘까?" 아이 방으로 옮겨 가는 사진이라면 그 사람이 함께 있어도 그대로 둡니다. 아이에게는 엄마 아빠가 나란히 웃는 몇 안 되는 증거입니다. 거실의 빈자리에는 아이와 둘이 새로 찍은 사진을 겁니다. 휴대폰으로 찍은 한 장을 뽑아 걸기만 해도 그 벽은 다른 벽이 됩니다.

날마다 덮는 이불과 받은 예물

결혼할 때 들인 물건은 반지와 앨범만이 아닙니다. 혼수로 산 이불, 시어머니가 맞춰 주신 한복, 처가에서 받은 시계. 쓸 수 있는 물건이라 더 곤란합니다. 매일 덮는 이불이 그 시절 것이라면 새 이불 한 채로 생각보다 많은 게 바뀝니다. 침실 하나가 다른 방이 됩니다.

양가에서 오간 예물을 돌려줘야 하는지 고민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대개는 이혼 합의 때 함께 정리하지만, 따로 정하지 않았는데 상대 쪽에서 돌려 달라고 한다면 혼자 판단하지 말고 법률구조공단 같은 곳에 먼저 물어봅니다.

사별한 사람의 반지

사별로 혼자가 된 사람에게 반지는 또 다른 물건입니다. 둘이 끝낸 약속이 아니라 한 사람이 먼저 떠난 약속입니다. 몇 해째 끼고 지내는 사람도, 목걸이에 꿰어 옷 안쪽에 거는 사람도 있습니다. 새 사람을 만나게 되면 그 반지를 언제 뺄지 고민이 시작되는데, 그 시기는 남이 정해 줄 수 없습니다.

물건을 정리하는 속도는 마음이 정리되는 속도와 꼭 같지 않습니다. 반지를 팔고도 한참 아픈 사람이 있고, 앨범을 그대로 두고도 잘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보낼지 가르는 기준은 하나면 됩니다. 지금의 내가 그 물건을 볼 때 숨이 막히는지, 아니면 그저 지나간 날의 물건으로 보이는지.

숨이 막힌다면 아직은 서랍 맨 아래 칸에 두면 됩니다. 지나간 날의 물건으로 보이기 시작했다면, 그때가 상자를 열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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