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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 후 회복·자존감

괜찮아지고 있다는 시시한 증거들

회복은 극적으로 오지 않습니다. 라디오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장바구니에 먹고 싶은 것을 담는 날처럼 작고 시시한 모습으로 옵니다.

괜찮아지고 있다는 시시한 증거들AI 모델 사진

회복은 생각보다 시시하게 옵니다. 영화처럼 어느 아침 창문을 열다 문득 깨닫는 순간 같은 건 없습니다. 대신 별것 아닌 일이 별것 아니게 지나가는 날이 하나둘 생깁니다. 그때는 모르고 지나쳤다가 한참 뒤에 돌아보면 그날이 시작이었다는 걸 압니다. 그런 날의 생김새를 알아 두면 지나가는 순간에 알아볼 수 있습니다.

라디오 노래를 흥얼거리다 멈칫한 날

이혼 직후에는 음악을 듣지 않게 됩니다. 신나는 노래는 시끄럽고 슬픈 노래는 너무 맞아서 견디기 어렵습니다. 차 안은 늘 조용하거나 뉴스만 흐릅니다. 그러다 어느 퇴근길,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를 나도 모르게 따라 부르고 있습니다. 흥얼거리다 스스로 놀라 입을 다뭅니다.

그 멈칫함이 신호입니다. 마음에 다시 소리가 들어갈 자리가 생겼다는 뜻입니다. 그날은 노래를 끝까지 들어 봅니다. 예전에 좋아하던 가수가 새 노래를 냈는지 찾아보는 저녁이 뒤따라올지도 모릅니다. 그 사람과 함께 듣던 노래가 나오면 서둘러 채널을 돌리던 손이, 어느 날은 그 노래를 끝까지 듣고 있기도 합니다.

장바구니에 먹고 싶은 것을 담는 날

한동안 장보기는 숙제였습니다. 아이 먹을 것, 떨어진 휴지와 세제, 대충 때울 라면. 내가 뭘 먹고 싶은지는 장바구니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결혼해 있을 때도 늘 식구들 입맛이 먼저였습니다.

그러다 마트 과일 코너에서 한참을 서성이는 날이 옵니다. 비싸서 매번 지나치던 포도 한 송이를 집어 들고, 처음 보는 소스병을 돌려 뒷면을 읽어 봅니다. 혼자 먹을 저녁 메뉴를 고르는 일이 귀찮지 않고 조금 즐겁습니다. 나를 먹이는 일에 다시 관심이 생겼다면 나를 돌볼 마음이 돌아오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 사람 이야기를 하다 말이 막히지 않을 때

한동안은 누가 전 배우자 이야기를 꺼내면 목이 막혔습니다. 그 사람을 입에 올리는 것만으로 그날 저녁이 흔들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이 담임과 상담을 하다가 "그날은 아이 아빠가 데리러 와요"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넘어갑니다. 말하고 나서야 아무렇지 않았다는 걸 알아챕니다.

그 사람을 다 이해했거나 용서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화나는 기억은 여전히 화나는 기억입니다. 다만 그 사람이 내 하루의 한가운데에서 가장자리로 옮겨 갔습니다. 휴대폰에 저장된 이름을 굳이 바꾸지 않아도 신경 쓰이지 않게 되는 것도 대개 이 무렵입니다.

다음 계절의 약속을 적어 넣는 저녁

힘든 시기에는 하루 앞도 버겁습니다. 다음 주에 뭐 하느냐고 물으면 대답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다 친구가 가을에 같이 단풍 보러 가자고 할 때, 습관처럼 그때 봐서라고 하지 않고 달력을 엽니다. 날짜를 적어 넣습니다.

석 달 뒤의 일을 기대한다는 건 석 달 뒤의 내가 지금보다 나을 거라고 믿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여행 적금을 새로 붓기 시작하는 것, 배우고 싶던 강좌에 등록하는 것도 같은 쪽에서 오는 변화입니다. 앞날을 그리는 손이 다시 움직이고 있습니다.

거울 앞에서 옷을 한 번 더 갈아입는 아침

한동안 옷은 손에 잡히는 대로 입었습니다. 무릎 나온 바지, 목이 늘어난 티셔츠, 같은 니트를 일주일 내내. 누구에게 보일 일도 없고 나를 들여다볼 기운도 없었습니다. 머리를 자른 지도 꽤 됐습니다.

그러다 어느 아침 거울 앞에서 셔츠를 한 번 갈아입습니다. 이 색보다 저 색이 낫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미용실 예약을 잡고, 오래 미뤄 둔 옷장 정리를 시작합니다. 누구에게 잘 보이려는 게 아니라 내 눈에 내가 괜찮아 보이고 싶어진 것입니다. 나를 다시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꽤 믿을 만한 신호입니다.

남의 이혼 이야기를 들어 주고 있는 나

어느 날 지인이 조심스럽게 연락해 옵니다. 자기도 이혼을 고민하고 있다고, 그때 어떻게 견뎠느냐고. 이야기를 듣다 보니 나도 모르게 그때 도움이 됐던 것들을 꺼내 놓고 있습니다. 서류는 이렇게 챙기면 덜 헤맨다고, 처음 몇 달은 원래 이렇게 힘들다고.

얼마 전까지 위로를 받기만 하던 사람이 위로를 건네는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그 통화를 끊고 나면 이상하게 기운이 납니다. 내가 지나온 시간이 누군가에게 쓸모가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되는 순간입니다. 남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 줄 여유가 생겼다는 것은, 내 이야기에 가득 차 있던 자리가 조금 비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크게 웃고 나서 미안하지 않은 밤

회복 초기에는 웃고 나면 죄책감이 따라옵니다. 이렇게 웃어도 되나, 아이는 저렇게 힘든데. 그래서 웃음이 짧게 끊깁니다. 그러다 친구들과 저녁을 먹다가 배가 아프도록 웃고, 집에 오는 길에도 그 장면이 떠올라 혼자 피식 웃습니다. 그날 밤에는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

나를 즐겁게 하는 일에 더 이상 허락이 필요하지 않게 된 것. 이 신호는 대개 가장 늦게 오지만, 한번 오면 오래 머뭅니다.

나쁜 날이 다시 찾아와도

이런 날들이 이어지다가도 갑자기 무너지는 날이 옵니다. 노래를 따라 부른 다음 주에 다시 차 안에서 울기도 합니다. 그럴 때는 모든 게 처음으로 돌아간 것 같습니다. 그래서 괜찮았던 날을 적어 두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휴대폰 메모장에 날짜 없이 한 줄씩. 노래 따라 부름, 포도 사 먹음, 웃음 참다 실패함.

나쁜 날에 그 목록을 열어 보면 다른 것이 보입니다. 오늘이 나쁘다고 해서 그날들이 없던 일이 되지는 않습니다. 회복은 나쁜 날이 사라지는 것이라기보다 좋은 날의 목록이 조금씩 길어지는 쪽에 가깝습니다.

아직 적을 게 한 줄도 없다고 느껴진다면, 오늘 하루에서 가장 덜 힘들었던 순간 하나를 첫 줄로 적어 두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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