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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 후 회복·자존감

이삿짐 트럭이 떠난 뒤의 첫날 밤

상자 스무 개와 나만 남은 거실, 처음 듣는 냉장고 소리. 이혼 후 새집에서 혼자 보내는 첫날 밤과, 그 집이 내 집이 되기까지의 며칠을 따라갑니다.

이삿짐 트럭이 떠난 뒤의 첫날 밤AI 모델 사진

이삿짐 업체 직원들이 마지막 상자를 내려놓고 확인서에 서명을 받아 갑니다. 현관문이 닫히고 엘리베이터 내려가는 소리가 멀어집니다. 그다음에 오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던 종류의 조용함입니다. 상자 스무 개와 나만 남은 거실에서, 어디부터 손대야 할지 몰라 한참을 서 있습니다.

반으로 나눈 살림이 도착하는 날

이혼 후의 이사는 짐을 옮기는 일이라기보다 짐을 나눈 결과를 확인하는 일입니다. 상자를 열면 숟가락은 세 벌, 냄비는 두 개뿐입니다. 전자레인지는 저쪽 집으로 갔고 늘 쓰던 프라이팬도 없습니다. 하나하나는 사소한데 없는 것을 발견할 때마다 마음이 쿡 찔립니다.

첫날에 다 채우려 하지 않아도 됩니다. 없는 물건은 휴대폰 메모에 적어만 둡니다. 일주일쯤 살아 보면 정말 필요한 것과 습관처럼 있던 것이 갈립니다. 예전 집 물건을 똑같이 다시 사는 대신 이번에는 내 손에 맞는 것을 고를 수 있습니다.

첫 끼는 상자를 식탁 삼아

이사한 날 짜장면을 시키는 건 오래된 습관입니다. 예전에는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온 식구가 둘러앉아 먹었습니다. 오늘은 한 그릇만 시키기가 멋쩍어 탕수육까지 시켜 놓고 반도 못 먹습니다. 상자 위에서 혼자 먹는 짜장면은 맛보다 기분으로 기억에 남습니다.

그 기분이 쓸쓸하다면 한 사람을 불러도 됩니다. 이사를 거들어 준 친구, 근처 사는 동생. 짐 정리를 도와 달라는 핑계면 부르기도 쉽습니다. 혼자가 편하다면 그것도 괜찮습니다. 다만 그날 저녁은 굶지 않습니다. 빈속으로 맞는 첫날 밤은 모든 게 더 크게 느껴집니다.

오늘 풀 상자는 세 개면 됩니다

첫날 저녁에 풀 상자는 많지 않습니다. 이불과 베개, 수건과 세면도구, 휴대폰 충전기. 하나를 더한다면 커튼입니다. 불 켠 집의 창문은 밖에서 훤히 보이고 아침 햇빛은 생각보다 일찍 들어옵니다. 커튼 봉이 아직 없다면 큰 수건이라도 걸어 둡니다.

짐을 풀다 보면 그 사람의 물건이 섞여 나오기도 합니다. 겨울 장갑 한 짝, 그 사람이 읽던 책, 둘이 번갈아 쓰던 머그잔. 오늘 밤에는 판단하지 않습니다. 빈 상자 하나를 정해 그런 물건을 모으고 테이프를 붙입니다. 어떻게 할지는 짐 정리가 끝난 뒤의 내가 정합니다.

그 사람이 하던 일을 처음 해 보는 저녁

새집에서는 그동안 남이 하던 일이 한꺼번에 내 차례가 됩니다. 보일러 온도를 맞추고, 현관 센서등이 왜 안 켜지는지 들여다보고, 세탁기 코스 이름을 하나씩 읽어 봅니다. 결혼 생활 내내 전구 한 번 갈아 보지 않은 사람도 있고, 음식물 쓰레기를 어디에 버리는지 처음 알아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모르는 게 부끄러운 일은 아닙니다. 둘이 살 때 일을 나눠 맡았을 뿐입니다. 관리사무소에 전화해 분리수거 요일을 묻고, 모르는 건 찾아보며 하나씩 해 봅니다. 서툴게 갈아 끼운 전구에 불이 들어오는 순간, 이 집이 처음으로 조금 내 편처럼 느껴집니다.

밤 열한 시, 집이 내는 소리

불을 끄고 누우면 집이 말을 시작합니다. 냉장고가 웅 하고 돌고, 보일러가 딸깍거리고, 윗집에서 의자 끄는 소리가 납니다. 복도에서 누군가의 발소리가 멈출 때마다 몸이 굳습니다. 익숙한 집이었다면 들리지도 않았을 소리입니다.

현관 잠금을 확인하고 누웠다가 다시 일어나 한 번 더 봅니다.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새집에서 몸은 며칠 동안 보초를 섭니다. 복도 쪽 작은 등이나 욕실 불 하나를 켜 두고 자면 깼을 때 덜 놀랍니다. 소리가 무섭다면 라디오를 낮게 틀어 두는 것도 방법입니다. 사흘쯤 지나면 냉장고 소리는 배경이 됩니다.

잠들기 전에 한 사람에게 사진 한 장을 보내 두는 것도 좋습니다. 상자가 쌓인 거실 사진에 도착했다는 말 한 줄이면 됩니다. 이 밤에 내가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이 하나 있다는 게 생각보다 큰 위안이 됩니다.

아이와 함께인 밤, 아이 없이 맞는 밤

아이와 함께 이사했다면 첫날 밤의 주인공은 아이입니다. 낯선 방에서 아이는 잠들지 못하고, 아빠는 이제 여기 안 오느냐고 묻기도 합니다. 그날은 아이 방 정리보다 아이 옆에 누워 있는 쪽이 먼저입니다. 아이가 아끼는 인형과 늘 덮던 담요를 이삿짐 맨 위에 실어 오면 그 밤이 한결 수월합니다.

아이가 다른 부모와 살게 되어 혼자 이사했다면, 아이가 올 날을 위해 마련한 방이 빈 채로 첫날 밤을 맞습니다. 작은 침대와 칫솔 하나만 놓인 방의 문을 닫을지 열어 둘지도 마음이 쓰입니다. 그 방을 서둘러 꾸미지 않아도 됩니다. 아이가 처음 오는 날 함께 벽에 붙일 스티커를 고르고 책상 자리를 정하면, 그 방은 아이가 직접 만든 자기 방이 됩니다.

새 주소로 내 이름이 불리는 날

이튿날 아침에는 동네를 한 바퀴 걷습니다. 약국과 세탁소, 밤늦게까지 여는 마트가 어디 있는지 봅니다. 동네를 모르는 집은 오래 남의 집처럼 느껴집니다. 가게 하나를 정해 같은 시간에 두세 번 들르면 주인이 먼저 인사를 건넵니다.

현관 도어락 번호를 아직 그대로 두었다면 오늘 바꿉니다. 전에 살던 사람도, 집을 보러 다녀간 사람들도 알고 있을지 모르는 번호입니다. 새 번호를 누르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면, 이 문을 여는 방법을 아는 사람이 이제 나뿐이라는 게 실감 납니다.

전입신고도 미루지 않습니다. 이사한 날부터 십사 일 안에 주민센터나 온라인으로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은행과 카드사, 회사 서류의 주소도 하나씩 바꿉니다. 그러다 어느 날 새 주소로 내 이름이 적힌 우편물이 처음 도착합니다. 별것 아닌 고지서 한 장인데 그걸 들고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기분이 묘하게 다릅니다.

집이 내 집이 되는 데는 계약서보다 시간이 더 걸립니다. 냉장고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는 사흘, 동네 가게 주인이 얼굴을 알아보는 몇 주, 마지막 상자를 접어 내놓는 날. 첫날 밤은 그 가운데 가장 긴 밤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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