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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는 말이 늦게 나오는 사람

먼저 말한 쪽은 대답을 기다리고, 아직 못 한 쪽은 그 말이 약속처럼 무겁습니다. 이혼 뒤 무거워진 한마디를 사이에 둔 두 사람의 속을 들여다봅니다.

사랑한다는 말이 늦게 나오는 사람AI 모델 사진

마지막으로 누군가에게 사랑한다고 말한 게 언제였는지 떠올려 보면, 의외로 기억이 흐릿한 사람이 많습니다. 결혼 초에는 했던 것 같고, 아이가 태어난 뒤로는 아이에게만 했던 것 같고, 끝 무렵에는 그 말을 하면 오히려 싸움이 날 것 같아 삼켰습니다. 그렇게 몇 년을 쓰지 않은 말은 다시 꺼내려 하면 녹이 슬어 있습니다.

그래서 새 연애에서 이 말을 두고 엇갈리는 두 사람이 생깁니다. 한 사람은 벌써 말했고, 한 사람은 아직 말하지 못합니다.

"고마워"가 돌아온 밤

석 달쯤 만났을 때 전화를 끊으며 먼저 말했습니다. 잠깐 조용하더니 "고마워, 잘 자"가 돌아왔습니다. 끊고 나서 한참 휴대폰을 들여다봤습니다. 고맙다는 말은 따뜻했는데, 듣고 싶었던 말은 아니었습니다.

먼저 말한 쪽은 그 순간 맨몸으로 서 있는 느낌이 듭니다. 내 마음은 다 보여 줬는데 상대의 마음은 보이지 않습니다. 다음 날부터는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을 저울에 올립니다. 오늘은 답장이 늦네, 아직 확신이 없나 보다. 혼자 무게를 재는 동안 연애가 시험처럼 변합니다.

먼저 말한 사람에게도 사정이 있습니다. 지난 결혼의 마지막 몇 해 동안 그 말을 한 번도 듣지 못한 사람은 이번에는 아끼지 않겠다고 마음먹고 연애를 시작합니다. 그래서 일찍 말하고, 그래서 대답이 늦으면 그때의 빈집 같은 저녁이 다시 떠오릅니다. 서운함이 유난히 큰 까닭은 지금의 연인보다 그 시절에 있습니다.

그 말이 무거워진 사람들

말하지 못하는 쪽은 대개 마음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지난번에 그 말을 했던 대가를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결혼식장에서 평생 사랑하겠다고 말했고, 그 약속이 서류 한 장으로 끝나는 것을 겪었습니다. 그 뒤로 이 말은 감정이 아니라 지키지 못할 수도 있는 약속처럼 들립니다.

이번에도 끝나면 그 말이 거짓말이 될까 봐 아끼는 사람도 있습니다. 확실해질 때까지 미뤄 두려는 겁니다. 원래 그런 말을 주고받지 않는 집에서 자란 사람도 있습니다. 부모님이 서로에게 그 말을 하는 걸 한 번도 못 보고 자란 오십 대 남자에게 사랑한다는 말은 외국어에 가깝습니다.

아이에게는 매일 하는 말인데

이상한 일이 하나 있습니다. 아이를 키우는 사람은 그 말을 매일 합니다. 등원 버스 앞에서, 잠들기 전 이불 위에서, 전화를 끊을 때마다. 그런데 같은 입으로 연인에게는 한 번을 못 합니다.

이혼을 지나는 동안 이 말의 주인이 아이로 정해져 버린 경우가 많습니다. 아이에게 하는 사랑한다는 말은 조건이 없고 끝도 없습니다. 연인에게 하는 말은 언제든 거둬질 수 있습니다. 한쪽은 안전하고 한쪽은 위험하니, 입이 안전한 쪽으로만 열립니다. 연인 쪽에서 이걸 알고 나면 아이에게는 술술 나오는 말이 자기에게만 막히는 모습이 덜 서운해집니다.

한 번 더 말해서 대답을 받아 내려 할 때

먼저 말한 쪽이 가장 쉽게 하는 실수는 그 말을 되풀이하는 것입니다. 사랑해, 하고 기다리고, 또 사랑해, 하고 기다립니다. 끝에 "너는?"이 붙기도 합니다. 그럴수록 상대는 그 말을 해내야 하는 숙제로 받습니다. 억지로 받아 낸 사랑한다는 말은 듣는 순간에도 개운하지 않습니다.

내 말은 선물로 두면 됩니다. 말한 것으로 내 몫은 이미 끝났고, 대답은 그 사람의 시간에 맡깁니다. 그렇게 마음먹으면 대답이 늦어도 내 말이 없던 일이 되지 않습니다.

반대쪽으로 기우는 사람도 있습니다. 대답이 없자 자존심이 상해 그 말을 아예 거둬 버리는 겁니다. 다시는 먼저 하지 않겠다고 입을 닫으면 두 사람 모두 그 말 근처에도 못 가는 연애가 됩니다. 아낄 필요도, 더 자주 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고 싶을 때 하던 만큼 하면 됩니다.

말이 아닌 곳에 적힌 대답

말이 늦은 사람은 대신 다른 데에 대답을 적어 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나가듯 말한 허리 통증을 기억했다가 파스를 사 오고, 비 오는 날이면 묻지 않아도 역 앞에 차를 대 놓고, 내 아이의 이름과 학년을 한 번도 틀리지 않습니다. 내가 좋아한다고 한 번 말한 빵집을 기억했다가 먼 길을 돌아 사 오기도 합니다. 이런 것을 하나씩 세다 보면 그 사람이 말을 아끼는 동안에도 꽤 많은 대답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반대로 말도 없고 이런 흔적도 없다면 표현이 서툰 것과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그때는 말을 기다릴 게 아니라 이 관계에서 내가 받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따져 볼 때입니다.

서로의 언어를 한 번은 말로 맞춥니다

엇갈림을 줄이는 가장 쉬운 길은 이 엇갈림 자체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먼저 말한 쪽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말로 들어야 마음이 놓이는 사람이야. 재촉하려는 건 아니고, 내가 그렇다는 걸 알아 줬으면 해서."

말이 늦은 쪽에게도 할 말이 있습니다. "나는 그 말이 좀 무거워. 예전 일 때문인 것 같아.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라는 것만 알아 줘." 이 두 문장이 오가고 나면 대답이 늦어지는 시간이 불안이 아니라 기다림이 됩니다.

입으로는 안 나와도 글로는 쓸 수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밤늦게 짧은 문자 끝에 그 말을 슬쩍 붙여 보내고, 다음 날 만나서는 모른 척합니다. 그걸 놀리지 않고 그대로 받아 주면 됩니다. 글로 먼저 길을 낸 말이 몇 주 뒤에는 목소리로 따라 나옵니다.

그 말은 대개 엉뚱한 때에 나옵니다

오래 아껴 둔 사람의 첫 사랑한다는 말은 근사한 자리에서 나오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트 주차장에서 장바구니를 트렁크에 싣다가, 감기 걸린 목소리로 전화를 끊다가, 혼잣말처럼 툭 나옵니다. 말한 사람이 더 놀란 얼굴을 합니다.

그때는 크게 반응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울컥해서 "드디어"라고 하거나 한 번만 더 말해 달라고 조르면 그 사람은 다음 말을 또 한참 아낍니다. 웃으며 "나도"라고 하면 됩니다. 녹슨 말은 한 번 나오고 나면 두 번째부터는 조금씩 부드러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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