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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 후 회복·자존감

돌싱이라는 말이 아직 입에 붙지 않는다면

서류의 결혼 여부 칸 앞에서 볼펜이 멈춥니다. 나를 가리키는 새 이름이 낯설고 무거운 사람에게, 그 말과 가까워지는 방법을 이야기합니다.

돌싱이라는 말이 아직 입에 붙지 않는다면AI 모델 사진

건강검진을 받으러 간 병원에서 접수 서류를 받습니다. 이름, 생년월일, 주소를 적어 내려가다가 한 칸에서 볼펜이 멈춥니다. 결혼 여부. 기혼, 미혼. 두 칸 가운데 어디에도 내 자리가 없습니다. 이혼한 지 여덟 달, 이런 칸을 만날 때마다 아직도 숨이 한 번 걸립니다. 뒤에 줄 선 사람이 있어 아무 데나 동그라미를 치고 서류를 내밉니다.

기혼도 미혼도 아닌 자리

이혼한 사람이 겪는 낯섦 가운데 하나는 나를 가리키는 말이 바뀌었다는 점입니다. 십 년 넘게 누구의 아내, 누구의 남편, 기혼자였습니다. 그 말이 사라진 자리에 새 말이 들어와야 하는데 어느 것도 몸에 맞지 않습니다.

이혼녀, 이혼남이라는 말은 사람보다 사건을 앞세우는 것 같아 싫습니다. 돌싱이라는 말은 그보다 가볍지만 방송에서 웃으며 쓰는 말 같아서 내 일에 붙이기가 어색합니다. 돌아온 싱글이라니, 나는 어디 다녀온 것이 아니라 한 시절을 통째로 살았는데 말입니다.

말 한마디에 실린 것들

그 말이 입에서 나오지 않는 까닭은 단어 자체가 아닙니다. 그 말을 했을 때 돌아올 것 같은 눈빛입니다. 뭔가 문제가 있었겠지, 참을성이 없었나 보다, 아이는 불쌍해서 어쩌나. 실제로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없어도 머릿속에서는 이미 듣고 있습니다.

가만히 따져 보면 그 눈빛은 남의 것이 아니라 내 것입니다. 이혼하기 전에 내가 이혼한 사람들을 보던 눈, 혹은 부모 세대에게서 물려받은 눈입니다. 그 눈으로 지금의 나를 보고 있으니 단어가 무거울 수밖에 없습니다. 말을 바꿀 수는 없어도 그 말을 보는 내 눈은 바꿀 수 있습니다.

가까운 데서부터 소리 내어 봅니다

처음으로 그 말을 입 밖에 내는 날은 누구에게나 어렵습니다. 그래서 연습할 자리를 고릅니다. 혼자 있는 차 안에서 말해 봅니다. 저 이혼했어요. 소리가 귀에 들어오는 느낌이 이상하지만 몇 번 하면 덜해집니다.

다음은 가장 편한 친구입니다. 이미 사정을 아는 사람 앞에서 그 단어를 써 봅니다. 나 이제 돌싱이잖아, 하고 가볍게. 친구가 웃으며 받아 주면 말의 무게가 조금 덜어집니다. 그다음이 덜 가까운 사람들입니다. 한꺼번에 모두에게 알릴 필요는 없습니다. 말은 쓸수록 닳아서, 열 번째쯤에는 내 직업을 말할 때와 비슷한 온도가 됩니다.

물어 오는 사람에게 하는 대답

질문은 예고 없이 옵니다. 새 직장의 회식 자리에서, 미용실 의자에서, 아이 친구 엄마와 나란히 선 운동장에서. 결혼하셨어요, 남편분은 뭐 하세요. 그때마다 얼어붙지 않으려면 대답을 몇 벌 준비해 둡니다.

스쳐 가는 사람에게는 "혼자 살아요"나 "아이랑 둘이 살아요"면 됩니다. 거짓이 아니고 더 묻기 어려운 대답입니다. 앞으로 오래 볼 사람에게는 한 번에 말해 두는 편이 편합니다. "저 이혼했어요. 아이는 제가 키우고요." 덧붙이는 설명 없이 여기서 끝냅니다.

말한 뒤에 잠깐의 침묵이 옵니다. 그 침묵을 메우려고 사정을 늘어놓지 않습니다. 상대가 당황해 "아, 죄송해요"라고 하면 "괜찮아요, 이제 꽤 됐어요"라고 받으면 됩니다. 더 캐묻는 사람에게는 "그건 좀 긴 얘기라서요" 하고 웃으며 닫습니다. 내 이혼의 사정을 설명받을 권리가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칸이 둘뿐인 서류 앞에서

기혼과 미혼만 있는 서류는 대개 지금 배우자가 있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상태대로 답하면 되고, 그것을 두고 속였다고 할 사람은 없습니다. 혼인 이력을 정확히 적어야 하는 서류에는 이혼이나 사별을 고르는 칸이 따로 있습니다. 그때는 그 칸에 표시합니다. 표시하는 손이 떨릴 까닭은 없습니다. 그 칸은 수많은 사람이 표시하라고 인쇄해 둔 칸입니다.

단어의 속은 쓰는 사람이 채웁니다

같은 말도 누가 어떤 얼굴로 쓰느냐에 따라 뜻이 달라집니다. 고개를 숙이고 말하는 돌싱은 실패한 사람이라는 뜻이 되고, 담담하게 말하는 돌싱은 한 번 살아 보고 끝낼 줄도 알았던 사람이라는 뜻이 됩니다.

이혼은 무너진 일이면서 동시에 고른 일입니다. 맞지 않는 생활을 계속하지 않기로 한 결정이었고, 그 결정에는 적지 않은 용기가 들었습니다. 그 뜻을 아는 사람은 나 자신뿐이니, 그 말에 무엇을 담을지도 내가 정합니다. 남들이 붙인 딱지로 두지 않고 내가 지나온 길의 이름으로 삼는 것입니다.

아이가 듣는 말

아이를 키우는 사람이라면 이 말이 한층 조심스럽습니다. 부모가 이혼이라는 단어를 숨기고 얼버무리면 아이는 우리 집에 부끄러운 일이 있다고 배웁니다. 반대로 부모가 평범한 말투로 "엄마 아빠는 이혼해서 따로 살아"라고 말하면 아이도 친구에게 그렇게 말합니다. 아이가 자기 가족을 설명하는 말투는 부모에게서 옵니다.

같은 말을 쓰는 사람들 사이

이 말이 가장 가벼워지는 곳은 같은 일을 겪은 사람들 사이입니다. 이혼한 친구와 마주 앉으면 설명할 것이 없습니다. 돌싱짝처럼 돌싱들이 모인 곳에서도 그렇습니다. 거기서는 그 말이 털어놓아야 할 고백이 아니라 모두가 깔고 앉은 바닥입니다. 바닥이 같으니 그 위의 이야기, 좋아하는 음식과 주말의 계획부터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런 자리에서 몇 번 웃고 나면 알게 됩니다. 이 말을 쓰는 사람들이 얼마나 평범하고 성실한지, 그리고 내가 그들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 조금도 부끄럽지 않다는 것을.

말이 입에 붙는다는 것은 그 말이 나를 더는 아프게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서류의 그 칸 앞에서 멈추는 시간도 조금씩 짧아집니다. 언젠가는 주소를 적을 때처럼 아무 생각 없이 지나가게 되고, 그날은 생각보다 가까이 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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