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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만남·데이트

나보다 형편이 훨씬 나은 사람을 만날 때

메뉴판 가격을 먼저 보는 내 눈이 낯선 날이 있습니다. 경제 형편이 다른 두 사람이 서로를 작게 만들지 않고 만나는 법을 양쪽 자리에서 살핍니다.

나보다 형편이 훨씬 나은 사람을 만날 때AI 모델 사진

반씩 내자는 말이 왜 어떤 날은 그렇게 어렵게 나올까요. 상대가 고른 식당의 메뉴판을 펼쳤을 때, 그 사람이 지나가듯 말하는 주말 골프 이야기를 들을 때, 아이 학원을 세 군데 보낸다는 말에 나는 한 군데도 버겁다는 생각이 스칠 때. 좋아하는 마음과는 상관없이 몸이 조금씩 작아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이혼한 사람끼리의 만남에서는 이 차이가 유난히 크게 벌어지기도 합니다. 재산을 나누고 형편이 반으로 줄어든 사람과, 그 과정을 비교적 가볍게 지나온 사람이 마주 앉기 때문입니다. 한쪽은 집을 줄여 이사했고, 다른 쪽은 살던 집에 그대로 삽니다.

예전의 나와 견주게 되는 마음

형편 차이가 아픈 까닭은 상대와의 비교만이 아닙니다. 예전의 나와의 비교가 같이 옵니다. 결혼 생활 동안에는 나도 저런 식당에 아무렇지 않게 갔고, 아이가 사 달라는 걸 사 줬습니다. 그 사람 앞에서 가격부터 확인하는 내 눈이 낯섭니다. 위축되는 건 상대가 나를 무시해서라기보다 내가 지금의 나를 아직 받아들이지 못해서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 위축을 상대 탓으로 돌리면 엉뚱한 다툼이 납니다. "당신은 돈 걱정을 안 해 봐서 몰라." 이 말이 튀어나오기 전에, 지금 내가 불편한 게 그 사람의 어떤 행동인지 아니면 내 처지인지를 먼저 갈라 봅니다. 행동이라면 말할 일이고, 처지라면 내가 다독일 일입니다.

얻어먹는 저녁이 쌓일 때

형편이 나은 쪽이 계산을 도맡는 일은 자연스럽게 굳습니다. 처음엔 고맙습니다. 세 번째쯤엔 미안하고, 열 번째쯤엔 빚진 느낌이 듭니다. 그 느낌은 대화에 티가 납니다. 가고 싶은 곳을 말하지 못하고, 서운한 일이 있어도 삼킵니다. 받기만 하는 사람은 목소리가 작아집니다. 남자라면 여기에 체면이 하나 더 얹히고, 여자라면 얻어먹는 사람으로 보일까 하는 걱정이 얹힙니다. 무게는 달라도 작아지는 건 같습니다.

금액으로 맞추려 하면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대신 내 몫을 정해 둡니다. 한 달에 한 번은 내가 사는 날이고, 그날은 내가 고른 곳으로 갑니다. 동네 칼국숫집이어도 괜찮습니다. 요리를 할 줄 안다면 집밥 한 상도 내 몫이 됩니다. 내 형편 안에서 내가 대접하는 저녁은 상대가 사는 비싼 저녁과 무게가 같습니다. 금액이 아니라 내가 주는 쪽에 서는 날이 있다는 게 관계의 균형을 잡아 줍니다.

선물 앞에서 머뭇거릴 때

생일이 다가오면 고민이 깊어집니다. 그 사람은 지난번 내 생일에 내 한 달 생활비만 한 가방을 건넸습니다. 같은 값을 돌려줄 수는 없습니다. 이럴 때는 값이 아니라 눈썰미로 갑니다. 그 사람이 지나가듯 말한 절판된 음반을 찾아 주거나, 매일 쓰는 물건 중 닳은 것을 새것으로 바꿔 두는 식입니다. 오래 지켜본 사람만 고를 수 있는 선물은 가격표 옆에 놓이지 않습니다.

아이들 사이에 생기는 차이

아이를 키우는 사람끼리라면 차이는 아이에게도 번집니다. 그 집 아이는 방학마다 해외에 가고, 우리 아이는 할머니 집에 갑니다. 아직 아이들끼리 만날 단계가 아닌데도 상대가 아이 이야기를 할 때마다 내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올라옵니다.

그 미안함은 연인에게 말하기 어려운 감정입니다. 그러나 두 집이 가까워질 무렵이면 꼭 꺼내야 하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아이들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 한쪽 아이만 비싼 것을 받는 장면은 아이들 사이에도 금을 냅니다. 두 집 아이가 함께하는 날의 씀씀이는 낮은 쪽에 맞추자고 미리 정해 두면 서로 덜 다칩니다.

주변에서 던지는 한마디

친구나 가족이 먼저 선을 넘기도 합니다. "잘 만났네, 이제 고생 끝이다." 축하하는 말인데 듣는 사람은 기분이 묘합니다. 내가 그 사람의 돈을 보고 만나는 사람이 된 것 같아서입니다. 형편이 나은 쪽 가족은 대놓고 "돈 보고 만나는 거 아니냐"고 묻기도 합니다.

일일이 해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사람 돈 말고 다른 게 좋아서 만나." 한 번이면 됩니다. 다만 이런 말을 들었다는 걸 연인에게 숨기지는 않습니다. 형편 차이가 있는 연애는 두 사람 바깥에서도 시험을 받는다는 걸 둘이 같이 알고 있어야 합니다.

내가 여유 있는 쪽이라면

반대 자리에 선 사람에게도 몫이 있습니다. 계산을 아무렇지 않게 해치우는 것이 늘 배려는 아닙니다. 상대가 낼 기회를 남겨 둡니다. 커피 한 잔이라도 사겠다고 하면 고맙게 받습니다. 장소를 매번 내가 고르지 않습니다. 내가 아는 곳은 대개 내 형편에 맞춘 곳입니다. 얼마짜리 시계를 샀다는 말, 그 정도는 별거 아니라는 말도 아낍니다. 상대에게는 작은 돌멩이처럼 쌓입니다.

가장 조심할 것은 돈으로 상대의 문제를 풀어 주고 싶은 마음입니다. 밀린 학원비를 대신 내 주거나 이사 비용을 보태 주고 싶어질 때가 있습니다. 진심이어도 초반에는 멈춥니다. 도움이 한 번 오가면 두 사람 사이에 보이지 않는 위아래가 생기고, 그 위아래는 다툴 때마다 고개를 듭니다. 도움은 상대가 먼저 말을 꺼낼 수 있을 만큼 관계가 단단해진 다음의 일입니다.

돈이 말을 대신하기 시작하면

마지막으로 살필 것이 있습니다. 돈이 결정권으로 바뀌는 순간입니다. 많이 내는 쪽이 여행지를 정하고, 만나는 요일을 정하고, 어느새 서운하다고 말할 자격까지 더 많이 가진 관계. 누가 의도하지 않아도 이런 흐름은 생깁니다. 그러니 가끔 확인합니다. 이 관계에서 내 의견이 내 지갑만큼 작아지고 있지는 않은지.

형편은 바뀝니다. 이혼 뒤 줄어든 살림이 몇 해 뒤 다시 일어서기도 하고, 넉넉하던 쪽에 큰일이 닥치기도 합니다. 지금의 차이를 높낮이로 만들지 않은 두 사람은 그 변화도 함께 건넙니다. 그래서 칼국숫집 계산서를 먼저 집어 드는 손이 생각보다 큰일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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