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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다는 말이 마지막으로 오간 날

고맙다는 말은 한 번에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나씩 당연한 일로 옮겨 가다가 용건만 남습니다. 지난 결혼에서 본 그 빈자리를 새 관계에서 다시 채우는 법.

고맙다는 말이 마지막으로 오간 날AI 모델 사진

이혼 서류를 정리하던 무렵, 전 배우자와의 대화창을 끝까지 올려 보게 되는 밤이 있습니다. 대부분 "몇 시에 와", "학원비 보냈어", "알았어"입니다. "고마워"를 찾아 한참 손가락을 움직이면, 마지막으로 나온 건 몇 해 전 이삿날쯤입니다. 크게 싸운 기억보다 그 빈 화면이 더 오래 남습니다.

고맙다는 말은 한 번에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나씩 당연한 일로 옮겨 가다가, 어느 날 보면 두 사람 사이에 용건만 남아 있습니다.

당연해지는 데 걸리는 시간

연애 초반에는 모든 게 고맙습니다. 데리러 와 준 것, 내가 좋아하는 반찬을 기억한 것, 늦은 밤 전화를 받아 준 것. 같은 일이 열 번쯤 되풀이되면 고마움은 기대가 됩니다. 백 번쯤 되면 의무가 됩니다. 그때부터는 해 주면 아무 말이 없고, 안 해 주면 서운한 일이 됩니다.

결혼 생활에서는 이 속도가 더 빠릅니다. 장을 보는 일, 아이 알림장을 챙기는 일, 차에 기름을 넣어 두는 일, 명절마다 양가에 전화를 돌리는 일. 누가 할지 정해진 일들은 고마움의 목록에서 빠져 역할의 목록으로 들어갑니다. 역할이 된 일은 아무도 세지 않습니다. 하는 사람만 압니다.

아무도 세지 않던 일들

이혼하고 나서야 입 밖으로 나오는 서운함은 대개 큰 사건이 아닙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작은 일들입니다. 아이가 아플 때마다 반차를 낸 사람, 주말마다 시댁 가는 길을 운전한 사람, 매달 공과금을 맞춰 넣은 사람. 그 일을 한 사람은 기억하고, 받은 사람은 기억하지 못합니다.

반대편에도 셈은 있었습니다. 밤늦게까지 일한 사람은 자기가 벌어 오는 돈이 당연해졌다고 느꼈고, 아이를 덜 보는 대신 지고 있던 짐은 아무도 몰라준다고 느꼈습니다. 두 사람 모두 고맙다는 말을 못 들었다고 기억하는 결혼이 많습니다. 둘 다 주지 않았으니까요.

미안하다는 말은 입에 붙었는데

새 연애를 시작한 사람 중에 미안하다는 말은 입에 붙어 있는데 고맙다는 말은 어색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늦어서 미안해", "바쁜데 미안해", "아이 때문에 또 미안해." 지난 결혼 끝 무렵, 무언가를 부탁하는 일이 곧 짐을 지우는 일이었던 사람에게서 자주 보입니다. 내가 받는 모든 것이 상대의 손해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같은 말을 고마움으로 바꾸면 공기가 달라집니다. "늦었는데 기다려 줘서 고마워." "아이 일로 약속 바꿨는데 이해해 줘서 고마워." 미안하다는 말은 내가 짐이라는 느낌을 남기고, 고맙다는 말은 상대가 무언가를 해 줬다는 사실을 남깁니다. 듣는 사람도 뒤쪽 말을 들을 때 다시 해 주고 싶어집니다.

무엇이 고마웠는지까지

"고마워" 한마디도 없는 것보다는 낫지만, 무엇이 고마웠는지를 붙여야 그 말이 상대에게 닿습니다. "장 봐 줘서 고마워"보다 "내가 피곤한 거 알고 장 먼저 봐 둔 거, 그거 진짜 고마웠어." 상대가 한 일만이 아니라 그 일 뒤에 있던 마음을 알아봤다는 표시입니다.

잘 말해지지 않는 건 상대가 하지 않은 것에 대한 고마움입니다. 내가 예민하게 굴었는데 맞받아치지 않고 넘어가 준 것, 전 배우자와의 통화가 길어졌는데 아무것도 묻지 않고 기다려 준 것. 상대가 참아 준 것을 알아차리고 말해 주는 사람은 드뭅니다. 드물어서 오래 남습니다.

나만 고마워하는 것 같을 때

반대로 내 쪽에서만 고맙다고 하고 있는 것 같은 날이 있습니다. 내가 챙기는 일들이 벌써 당연한 일로 옮겨 가는 것 같아 불안해지고, 지난 결혼의 그 빈 대화창이 떠오릅니다. 이번에는 혼자 셈하지 않고 말합니다. "내가 이것저것 챙기는 거, 가끔은 알아줬으면 좋겠어. 고맙다는 한마디면 돼."

이런 말이 구걸 같다고 느끼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상대는 몰라서 안 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표현을 잘 안 하는 집에서 자랐거나, 지난 결혼에서 그 말이 오가지 않았던 사람일 수 있습니다. 한 번 말해 주면 다음부터는 신경을 씁니다. 말해 줬는데도 달라지지 않는다면, 그때는 이 관계에서 내가 어떤 자리에 있는지 따져 볼 일입니다.

아이가 보고 있는 식탁

아이를 키우는 사람이라면 하나가 더 있습니다. 부모가 이혼하기 전 몇 해 동안의 집에서 아이는 어른들이 서로 고맙다고 말하는 장면을 거의 보지 못했을 수 있습니다. 새 연인과 아이가 함께하는 자리가 생긴다면 그 자리에서 오가는 작은 고마움은 아이에게도 하나의 장면으로 남습니다. 물을 따라 준 사람에게 고맙다고 하고, 그 말에 웃음이 돌아오는 것. 따로 가르치지 않아도 아이는 어른들 사이에 이런 말이 오갈 수 있다는 걸 봅니다.

아이에게 직접 건넬 고마움도 있습니다. 엄마 아빠가 늦는 동안 동생을 봐 준 큰아이, 바뀐 일정에 투덜대면서도 따라와 준 아이. "오늘 기다려 줘서 고마워." 아이도 자기 몫을 알아주는 말을 기다립니다.

오늘 하나만

거창하게 시작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루에 하나, 상대가 해 준 일 가운데 당연하다고 넘기려던 것을 골라 말로 꺼냅니다. 문자도 괜찮습니다. "아까 우산 챙겨 준 거 고마웠어." 쑥스러우면 짧아도 됩니다. 얼굴 보고 하기 어색한 사람은 헤어지고 돌아가는 길에 보내는 문자가 편합니다. 그날 저녁에 있었던 일 하나를 집어 고맙다고 적으면, 상대는 그 저녁을 한 번 더 기억합니다. 당연한 일 목록으로 넘어가려는 것을 한 번 붙잡아 두는 것, 그거면 됩니다.

고맙다는 말을 하는 데는 이 초가 걸립니다. 그 이 초를 아끼다가 무엇을 잃는지, 우리는 이미 한 번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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