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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재혼 준비

남의 아이를 사랑해야 한다는 숙제

연인의 아이가 예쁘지 않습니다. 그런 마음이 드는 자신이 나쁜 사람 같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합니다. 사랑보다 먼저 줄 수 있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남의 아이를 사랑해야 한다는 숙제AI 모델 사진

비가 오는 날이었습니다. 버스 정류장에서 그 사람의 아이와 둘이 서 있게 됐습니다. 우산을 아이 쪽으로 기울여 주면서 문득 생각합니다. 나는 이 아이가 좋은가. 솔직한 대답은 잘 모르겠다였습니다. 싫은 것은 아닌데 예쁘지도 않습니다. 내 어깨가 젖는 것을 느끼면서,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조금 무서웠습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마음

아이가 있는 사람을 만나는 이들 가운데 많은 수가 이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연인은 좋은데 그 아이에게는 정이 가지 않습니다. 밥 먹는 소리가 거슬리고, 버릇없는 말투에 속이 끓고, 둘이 있고 싶은 주말에 아이가 끼는 것이 달갑지 않습니다. 때로는 그 사람의 관심을 아이에게 빼앗기는 기분까지 듭니다.

이 마음은 입 밖에 낼 수가 없습니다. 아이를 미워하는 어른은 동화 속 악역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 다정한 척을 하고, 그 연기에 지치고, 지친 만큼 아이가 더 불편해집니다. 숨길수록 커지는 마음입니다.

사랑은 의무로 생기지 않습니다

먼저 알아 둘 것이 있습니다. 남의 아이를 보자마자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내가 낳은 아이에 대한 사랑도 하루아침에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밤새 안아 재우고, 아플 때 간호하고, 처음 걷던 날을 지켜본 시간이 쌓여 만들어졌습니다. 연인의 아이와는 그 시간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주변은 기대합니다. 그 사람을 사랑하면 그 아이도 당연히 예쁠 것이라고. 연인도 기대합니다. 우리 애 예쁘지, 하고 묻습니다. 이 기대에 맞추려는 순간 사랑은 숙제가 됩니다. 숙제로 받은 감정은 생기지 않습니다. 생긴 척할 수 있을 뿐입니다.

사랑보다 먼저 줄 수 있는 것

사랑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지만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예의와 공정함과 한결같음입니다. 아이가 말할 때 휴대폰을 내려놓고 듣는 것, 약속한 것을 지키는 것, 기분에 따라 태도를 바꾸지 않는 것. 이것은 감정이 없어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목표를 낮추면 숨이 쉬어집니다. 엄마나 아빠가 되려 하지 말고 믿을 만한 이웃 어른쯤을 목표로 삼습니다. 조카의 친구를 대하듯, 친절하지만 넘치지 않게. 좋아하려고 애쓰는 대신 존중하려고 애씁니다. 신기하게도 애정은 이 거리에서 자라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까워지려고 밀고 들어갈 때보다 한 걸음 떨어져 꾸준할 때 아이가 먼저 다가옵니다.

아이에게도 나를 좋아할 의무가 없습니다

반대쪽도 같습니다. 아이가 나를 차갑게 대하면 서운하고, 노력을 몰라주는 것 같아 억울합니다. 하지만 아이는 이 관계를 고른 적이 없습니다. 어른 둘이 좋아서 시작한 일에 끌려 들어왔을 뿐입니다.

아이가 나를 반기지 않는 데에는 나와 상관없는 까닭이 있습니다. 나에게 웃어 주면 따로 사는 엄마나 아빠에게 미안해지는 것입니다. 아이의 냉랭함은 대개 나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자기 부모에 대한 의리입니다. 그렇게 읽으면 덜 아프고, 덜 아파야 오래 한결같을 수 있습니다.

내 아이와 다르게 느껴지는 것

나에게도 아이가 있다면 비교가 따라옵니다. 내 아이의 투정은 귀엽고 그 아이의 투정은 거슬립니다. 같은 행동인데 다르게 보입니다. 이 차이에 놀라 스스로를 탓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느낌이 다른 것은 당연합니다. 십 년을 키운 아이와 몇 달 본 아이가 같게 느껴진다면 그쪽이 오히려 이상합니다.

지켜야 할 것은 느낌이 아니라 행동입니다. 간식을 살 때 한쪽만 챙기지 않는 것, 규칙을 두 아이에게 똑같이 적용하는 것, 내 아이 편만 들지 않는 것. 아이들은 마음속은 못 봐도 대우의 차이는 정확히 봅니다. 공정한 대우는 사랑이 자랄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켜 주는 버팀목입니다.

거슬리는 버릇은 내가 고치지 않습니다

정이 덜 든 아이의 버릇은 더 크게 보입니다. 식사 예절, 말투, 휴대폰 보는 시간. 한마디 하고 싶어집니다. 참는 편이 낫습니다. 믿음이 쌓이지 않은 어른의 지적을 아이는 가르침이 아니라 공격으로 받습니다.

불편한 것은 연인에게 말합니다. "아이가 식탁에서 휴대폰을 보는 게 나는 좀 불편해. 당신이 한번 이야기해 줄 수 있을까." 아이를 가르치는 일은 부모의 몫으로 남겨 두고, 나는 내 불편을 어른에게 전하는 것까지만 합니다.

연인에게 이 마음을 말해도 될까

말해야 합니다. 다만 문장을 골라야 합니다. "당신 아이가 싫어"는 부모에게 견딜 수 없는 말입니다. 같은 마음을 다르게 말합니다. "나는 아직 아이가 어색해. 잘 지내고 싶은데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 당신이 바라는 만큼 빨리 가까워지지 못해도 기다려 줬으면 해."

이 말을 들은 연인의 반응이 관계의 앞날을 알려 줍니다. 그럴 수 있다고, 천천히 하자고 말하는 사람과는 긴 길을 함께 갈 수 있습니다. 내 아이를 사랑하지 않으면 나도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고 몰아붙이는 사람이라면 그 기대의 무게를 내가 평생 질 수 있는지 따져 봐야 합니다.

끝내 정이 붙지 않더라도

몇 해가 지나도 애틋한 마음은 생기지 않기도 합니다. 그것만으로 실패는 아닙니다. 사랑하지는 못해도 공정하고 믿을 만한 어른으로 남는 길이 있고, 아이에게는 그런 어른도 귀합니다. 다만 무덤덤함이 미움으로 자라는 것이 느껴진다면 솔직해져야 합니다. 아이를 미워하면서 한집에 사는 것은 아이에게도 나에게도 해롭습니다. 살림을 합치기 전에 이 마음을 확인해 보는 시간이 있어야 하는 까닭입니다.

비 오는 정류장에서 나는 그 아이를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우산은 아이 쪽으로 기울어 있었습니다. 지금 줄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이고, 그것으로 충분한 날이 꽤 오래 이어져도 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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