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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 후 회복·자존감

마트에서 전 배우자를 마주쳤다

카트를 밀다가 맞은편에서 낯익은 뒷모습을 봅니다. 준비 없이 찾아오는 그 몇 초를 어떻게 지나갈지, 돌아와서 뒤숭숭한 마음은 어떻게 할지 이야기합니다.

마트에서 전 배우자를 마주쳤다AI 모델 사진

토요일 오후의 마트는 붐빕니다. 우유를 고르고 카트를 돌리는데 통로 끝에 낯익은 어깨가 보입니다. 걸음걸이만 봐도 압니다. 이 년 전까지 같은 집에 살던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아직 나를 보지 못했습니다. 카트 손잡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고, 심장이 귀에서 뜁니다. 통로는 하나이고 그 사람은 이쪽으로 오고 있습니다.

몸이 먼저 압니다

헤어진 지 몇 해가 지났어도 전 배우자와 갑자기 마주치면 몸이 반응합니다. 숨이 얕아지고 손이 차가워집니다. 다 정리했다고 믿었던 사람일수록 이 반응에 당황합니다. 아직도 마음이 남았나 하고 스스로를 의심합니다.

대개는 미련이 아닙니다. 오랜 세월 내 생활의 가장 큰 부분이었던 사람을 예고 없이 본 데서 오는 놀람입니다. 예전에 살던 집 앞을 지날 때 가슴이 내려앉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 집에 다시 살고 싶어서가 아니라, 거기 살던 시절의 내가 한꺼번에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피해도 되고, 인사해도 됩니다

이 몇 초 동안 고를 길은 셋입니다. 다른 통로로 빠지는 것, 눈이 마주치면 고개만 숙이는 것, 다가가 인사하는 것. 어느 쪽이 어른스러운지 따질 일이 아닙니다. 지금 내 상태에 맞는 것을 고르면 됩니다.

피하는 것은 비겁한 일이 아닙니다. 아직 얼굴을 보고 말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카트를 돌려 다른 쪽으로 가는 것이 나를 지키는 방법입니다. 장을 다 못 봤어도 계산하고 나와도 됩니다. 반대로 눈이 마주쳤는데 못 본 척 고개를 돌리는 것은 서로에게 오래 남습니다. 마주쳤다면 목례 하나가 가장 무난합니다.

인사하게 됐을 때는 십 초면 됩니다

말을 섞게 되었다면 짧게 합니다.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죠." 상대가 답하면 "네, 저도요. 그럼 장 잘 보세요." 여기까지입니다. 근황을 길게 묻지 않고, 달라진 모습을 평하지 않고, 지난 일을 꺼내지 않습니다.

아이를 함께 키우는 사이라면 아이 이야기가 나오기 쉽습니다. 그 자리에서 일정이나 돈 문제를 의논하지는 않습니다. "그 얘기는 문자로 해요" 하고 넘깁니다. 통로 한가운데는 그런 이야기를 할 곳이 아니고, 준비 없이 시작한 대화는 예전의 말투를 불러옵니다.

그 사람 옆에 누군가 있을 때

가장 마음이 복잡한 경우입니다. 전 배우자가 낯선 사람과 나란히 카트를 밀고 있습니다. 머리로는 당연한 일인데 속이 울렁입니다. 그 사람이 나와 살 때는 하지 않던 다정한 표정을 짓고 있다면 더 그렇습니다.

이때는 먼저 다가가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눈이 마주치면 목례하고 지나갑니다. 상대가 소개하려 하면 "안녕하세요" 한마디로 받고 자리를 뜹니다. 그 사람을 위아래로 살피거나 내가 누구인지 설명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 표정이 아프게 남는다면 기억해 둡니다. 사람은 누구와 있느냐에 따라 다른 얼굴이 되고, 나도 지금은 그 사람과 살 때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내 옆에 연인이 있을 때도 있습니다. 당황해서 손을 놓거나 한 걸음 떨어지면 연인이 상처를 받습니다. 평소대로 서 있고, 지나간 뒤에 말해 줍니다. "방금 그 사람이 아이 아빠야." 미리 이런 날이 올지 모른다고 말해 둔 사이라면 훨씬 수월합니다.

아이가 함께 있을 때

아이와 장을 보다가 마주치면 아이가 먼저 달려갑니다. 아빠다. 그 순간 내 얼굴이 굳으면 아이는 반가워해도 되는지 눈치를 봅니다. 숨을 한 번 쉬고 따라갑니다. 아이가 인사하고 몇 마디 나누게 둡니다. 아이에게 이 만남은 좋아하는 두 사람을 한자리에서 본 드문 일입니다.

오래 끌지는 않습니다. "아빠랑은 다음 주에 또 만나지. 우리 장 마저 보자." 헤어진 뒤 아이가 왜 같이 안 가느냐고 물으면 담담하게 답합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전 배우자 옆에 있던 사람에 대해 아이에게 캐묻지 않습니다.

하필 가장 후줄근한 날에

이상하게도 이런 일은 감지 않은 머리에 늘어난 옷을 입고 나간 날 일어납니다. 상대는 말끔합니다. 그 대비가 하루 종일 떠나지 않습니다. 잘 지내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는데 가장 초라한 꼴을 보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사람도 비슷한 생각을 하며 돌아갔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람은 자기 모습의 흠만 크게 봅니다. 그리고 따져 보면 그 사람에게 잘 보일 까닭이 이제 없습니다. 내가 잘 지내는지는 그날의 옷이 아니라 내 생활이 압니다.

집에 돌아온 저녁

마주친 날은 뒤숭숭합니다. 저녁을 차리다가도 그 장면이 되감깁니다. 좋았던 때가 떠오르기도 하고, 다퉜던 밤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하루 이틀은 그럴 수 있습니다.

이 흔들림을 다시 연락하라는 신호로 읽지는 않습니다. 오늘 반가웠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싶어지면 하룻밤을 넘깁니다. 대부분 아침이 되면 보내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깁니다. 마음에 올라온 것은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과 보낸 내 세월입니다. 그 세월을 잠깐 애도하고 내려놓으면 됩니다. 믿을 만한 친구에게 오늘 그 사람을 봤다고 말하는 것만으로 꽤 가라앉습니다.

같은 동네에 사는 사이라면

아이 학교 때문에 가까이 사는 경우에는 이런 일이 되풀이됩니다. 처음 몇 번은 힘들지만 횟수가 쌓이면 무뎌집니다. 여섯 번째쯤에는 이웃을 만난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고 지나가게 됩니다. 그 무뎌짐이 회복의 한 모습입니다.

그때까지는 생활을 조금 조정해도 됩니다. 장 보는 요일과 시간을 바꾸고, 자주 가던 가게를 옮깁니다. 지는 것이 아니라 내 평온을 위한 살림의 요령입니다.

무서운 사람이었다면

지금까지는 평범하게 헤어진 사이의 이야기입니다. 폭력이나 위협이 있었던 사람이라면 예의를 차릴 까닭이 없습니다. 눈이 마주치기 전에 사람이 많은 쪽으로 움직이고, 직원 가까이에 섭니다. 따라오거나 말을 걸며 붙잡는다면 바로 112에 전화합니다. 우연이 자꾸 겹친다면 우연이 아닐 수 있으니 날짜와 장소를 적어 둡니다.

통로 끝에서 그 사람이 고개를 듭니다. 눈이 마주칩니다. 고개를 한 번 숙입니다. 그 사람도 숙입니다. 카트 두 대가 서로를 지나칩니다. 심장은 아직 뛰지만 손에 쥔 우유는 그대로이고, 장바구니에는 오늘 저녁에 끓일 찌개 재료가 들어 있습니다. 계산대로 가는 걸음이 생각보다 멀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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