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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한 만남

아이를 연인에게 맡겨도 되는 때

갑작스러운 야근 날, 연인이 아이를 데리러 가 주겠다고 합니다. 고마운 제안 앞에서 멈칫하는 마음은 지나친 것이 아닙니다. 맡기기 전에 밟을 순서를 이야기합니다.

아이를 연인에게 맡겨도 되는 때AI 모델 사진

오후 다섯 시, 회의가 길어질 것이라는 공지가 뜹니다. 어린이집은 일곱 시에 문을 닫습니다. 친정어머니는 여행 중이고 평소 부탁하던 이웃은 전화를 받지 않습니다. 발을 구르는 사이 연인에게서 메시지가 옵니다. 제가 데리러 갈까요. 집에서 같이 저녁 먹고 있을게요. 만난 지 일곱 달, 아이와는 다섯 번쯤 함께 밥을 먹은 사람입니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손가락이 답장을 쓰지 못합니다.

멈칫하는 마음은 지나친 것이 아닙니다

이 망설임에 죄책감을 느끼는 부모가 많습니다. 좋은 사람인데 내가 의심하는 것 같아서, 호의를 무시하는 것 같아서입니다. 그 망설임은 의심이 아니라 부모가 하는 일입니다. 아이를 다른 어른의 손에 맡기는 것은 연인이든 친척이든 새로 구한 돌봄 선생님이든 같은 순서를 밟아야 하는 일입니다.

대부분의 연인은 좋은 어른입니다. 그 사람이 믿을 만하다는 것과 내가 순서를 지키는 것은 부딪히지 않습니다. 순서를 지킨 뒤에 맡기면 나도 편하고, 그 사람도 떳떳하고, 아이도 안심합니다.

맡길 만한 사이가 되기까지

기준은 사귄 기간보다 아이와 보낸 시간입니다. 연인과 일 년을 만났어도 아이와는 세 번 본 사이라면 아이에게 그 사람은 아직 낯선 어른입니다. 내가 함께 있는 자리에서 아이와 그 사람이 충분히 시간을 보낸 뒤라야 합니다.

단계를 나누면 수월합니다. 처음에는 셋이 함께 있습니다. 다음에는 같은 집 안에서 내가 다른 일을 하는 동안 둘이 놀게 둡니다. 그다음에 내가 삼십 분쯤 가게에 다녀옵니다. 그렇게 늘려 간 끝에 한나절을 맡깁니다. 급한 날 갑자기 건너뛰지 않으려면 급하지 않은 날에 이 계단을 밟아 두어야 합니다. 오늘처럼 급한 날에 대비해 연인 말고도 부탁할 사람을 한둘 더 만들어 두는 것도 같은 준비입니다.

함께 있을 때 봐 둘 모습

셋이 지내는 동안 살펴볼 것은 그 사람이 아이를 얼마나 예뻐하는가가 아닙니다. 아이의 싫다는 말을 어떻게 대하는가입니다. 아이가 안기기 싫어할 때 물러나는지, 간지럽히다가 그만하라고 하면 바로 멈추는지 봅니다. 귀엽다며 억지로 뽀뽀하거나 무릎에 앉히려는 어른은 악의가 없더라도 아이의 경계를 가볍게 여기는 사람입니다.

화가 났을 때의 모습도 봅니다. 아이가 물을 쏟거나 떼를 쓸 때 목소리와 표정이 어떻게 변하는지. 그리고 아이와 둘만의 비밀을 만들려 하는지 살핍니다. 엄마한테는 말하지 말자는 말은 과자 한 봉지에 관한 것이라도 좋은 신호가 아닙니다. 형편에 넘치는 선물을 자주 안기는 것도 눈여겨봅니다.

돌봄의 선을 미리 말해 둡니다

맡기기 전에 정해 둘 것들이 있습니다. 목욕시키기와 옷 갈아입히기, 화장실 뒤처리는 부모가 한다. 아이 방의 문은 열어 둔다. 재우는 일은 내가 돌아와서 한다. 큰 소리를 내거나 손을 대어 혼내지 않는다. 아이의 사진을 찍어 다른 데 올리지 않는다. 아이를 보는 동안 술을 마시지 않는다.

말로 하기 어색하지만 해야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꺼내면 덜 딱딱합니다. "아이 맡길 때 내가 정해 둔 규칙이 있어요. 누구에게 맡기든 똑같이 부탁하는 거예요." 그 사람만 의심해서가 아니라는 것을 알리는 말입니다.

그 말을 들은 사람의 얼굴

이 선을 들은 연인의 반응이 많은 것을 알려 줍니다. 좋은 어른은 이렇게 답합니다. 당연하죠, 또 조심할 게 있으면 알려 줘요. 아이를 키워 본 사람이라면 자기도 그렇게 해 왔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반대로 서운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를 그런 사람으로 보느냐, 그렇게 못 믿으면서 왜 만나느냐. 이 반응은 넘기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아이를 지키려는 부모의 조심을 자기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이의 안전보다 자기 기분이 먼저인 사람입니다. 규칙을 번거로워하며 한두 개씩 어기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에게 일러둘 말

어른끼리의 약속과 따로 아이에게도 알려 줄 것이 있습니다. 특정한 사람을 겨냥한 말이 아니라 평소에 해 두는 이야기로 합니다. 네 몸은 네 것이라서 누가 만지는 게 싫으면 싫다고 말해도 된다. 어른이 비밀로 하자고 하는 일은 엄마한테 말해도 되고, 말해도 혼나지 않는다. 불편하거나 무서우면 언제든 엄마한테 전화해도 된다.

이 이야기를 들은 아이는 겁을 먹는 것이 아니라 든든해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말할 곳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휴대폰이 없는 아이라면 엄마 번호를 외우게 하고, 그 사람에게도 아이가 전화하고 싶다고 하면 바로 걸어 달라고 부탁해 둡니다.

맡긴 날 저녁의 대화

돌아와서 재미있었느냐고 물으면 아이는 응이라고 답하고 끝납니다. 조금 다르게 묻습니다. 뭐 하고 놀았어, 저녁은 뭐 먹었어, 아저씨랑 있을 때 불편한 건 없었어. 캐묻는 투가 아니라 하루를 궁금해하는 투로 묻습니다.

말보다 행동이 먼저 알려 주기도 합니다. 잘 따르던 아이가 갑자기 그 사람을 피하거나, 그 사람이 온다는 말에 배가 아프다고 하거나, 잠을 설치고 어린 짓으로 돌아간다면 까닭을 살핍니다. 대개는 낯가림이나 질투 같은 평범한 이유입니다. 그래도 그냥 넘기지 않고 한동안 다시 셋이 있는 단계로 돌아갑니다.

아이가 싫다고 말했을 때

아이가 그 사람과 둘이 있기 싫다고 하면 이유를 다 듣지 못했더라도 그대로 따릅니다. 왜 그러느냐고 다그치거나 좋은 분이라고 설득하지 않습니다. "알겠어, 말해 줘서 고마워. 엄마가 있을 때만 만나자." 아이의 말이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 먼저입니다.

만약 아이의 이야기에 몸을 만졌다거나 때렸다는 내용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따져 묻기 전에 아이를 떼어 놓습니다. 아이에게 되풀이해 묻지 않고, 들은 말을 그대로 적어 둔 뒤 112나 아동보호 전문기관에 도움을 청합니다. 이런 일은 드뭅니다. 하지만 드문 일을 위해 순서를 지키는 것이 부모의 일입니다.

그날은 답장을 이렇게 보냈습니다. 고마워요. 오늘은 어린이집에 사정을 말해 볼게요. 대신 주말에 셋이 같이 저녁 먹어요. 연인은 알겠다고,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라고 답했습니다. 그 대답을 보며 생각합니다. 이 사람에게는 머지않아 맡길 수 있겠다고. 서두르지 않아도 기다려 주는 사람이라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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